12월 드로잉 중 일부 +작품들+


중2 병 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 세계와 주체 간의 화해를 위한 제의(祭儀)적 몸짓 +리뷰들+




쿄애니가 미쳤다.



이번 작품에서 쿄 애니는 전작 <빙과>에서 보여주었던 일상에 대한 주체와 세계 간의 이분법적 시선의 한계를 이번 <중2병 이라도 사랑이 하고싶어>에서 극복한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보여주었던 '불가시 경계선'의 모습과 '타카나시 릿카'가 외친 '안녕!' 이라는 절절한 외침은 소위 '중2병' 이 기존까지 보여주었던 세계에 대한 일방적 도피와 부정, 즉 세계와 주체 간의 갈등을 승화시키며 그 순간 삶은 개인과 세계 간의 대립의 공간이 아닌 아닌 상생의 장(場) 으로서 변모한다.



 교토 애니메이션, <중2 병이라도 사랑이 하고싶어>, 2012, 영상매체



<중2 병 이라도 사랑이 하고싶어>는 그 제목에서 풍기는 B 급 포스와는 다르게 절대로 우습게 볼 작품이 아니었다. 그 누가 알았겠는가, '중 2 병'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삶의 태도를 소재로 세계와 주체 간의 갈등을 다룰 줄 말이다. 최근 급증하였던 3류 뽕빨물의 물결에 지쳐버린 감상자들 중 일부는 단지 이 작품의 제목과 소재만을 보고 피상적으로 작품을 평가해 버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품이 끝난 지금, 이 작품은 교토 에니메이션이 한 분기를 대충 때우기 위해 만든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과 동시에 작화와 동화의 섬세함 만으로 평가받았던 신생 제작사였던 교토 애니메이션을 어엿한 중견 제작사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충분한 완성도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만들었다.

어쩌면 <스즈미야 하루이의 우울> 이래 교토 애니메이션의 역대 작품 중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을 이 작품은 현실과 개인, 즉 세계와 주체 간의 관계에 있어서 기존의 작품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 작품은 현실을 미화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작화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현실을 인식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중2 병이라도 사랑이 하고싶어>는 <K-on>처럼 현실을 푹신푹신한 낙원으로 표현하지도,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처럼 탈출하고 싶은 잿빛 벌판으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일상> 처럼 아예 비현실적인 풍경을 그려내어 감상자에게 현실에서 탈출하기를 유도하지도 않는다. 이 작품에서 교토 애니메이션은 그저 '현실' 그 자체를 그려낸다. 이러한 모습은 전작 <빙과>에서 표현되었던 일상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빙과>와 <중 2 병이라도 사랑이 하고싶어>는 주체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 뿐 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태도에 있어서 극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빙과>는 세계와 주체 간의 관계를 기존과는 다른 기이한 방식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이한 작품이었다. 교토 애니메이션은 일상이라는 소재를 극대화 시키기 위해 자사 특유의 극도로 세밀한 필치와 사실적인 조명, 음향효과를 복합적으로 사용하여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일상의 풍경을 보여준다. 빙과에서 그려내는 풍경의 세밀함은 이미 섬세한 일상적 풍광 묘사로 호평받은 <K-ON>를 능가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극의 진행에 있어서, 인물들은 그러한 세계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저항하고 삶에 고유한 의미부여를 시킴으로서 현실을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 방법으로서 <빙과>는 사소한 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극대화시켜 일상을 독특한 의미를 지니는 비일상으로 만들어낸다. 아니, 정확히는 철저하게 인식론적인 태도로서 세계를 여과시켜 주체 고유의 세계로서 전환시켜 버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물들은 물화되는 사물로서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개성적인 인격체로서 구성되어 간다.

이러한 현실인식에 있어서 <빙과>는 2007년 교토 애니메이션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작품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과 작품의 서사 방식은 다를지언정, 결과적으로 세계와 주체를 인식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이라는 이름의 세계를 내심 거부하는 인물들(쿈-하루히)과 무미건조하고 거대한 물리적 현실로서의 세계 간 의 대립구조는 세부적인 설정과 갈등의 강도만 바뀌었을 뿐 <빙과>에서도 그대로 투영된다. 비록 <빙과>에서 인물들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서와 같이 비현실적인 설정에 의존하여 세계를 물리적으로 바꾸는 비현실적이며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지만, 대신 사소한 것에 대한 집중과 개인적 의미 부여 라는 미시적 삶의 세계로 집중해 들어감으로서 세계를 주체와 철저하게 분리하며 현실에 대한 묘사보다는 개인의 심정과 삶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는다.

이처럼 기존의 교토 애니메이션의 작품들은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세계와 주체 간의 갈등을 바탕으로 현실에 저항하며 나아가 세계를 물리적으로 변화시키는 판타지적 모습을 보이거나 반대로 개인적인 삶의 모습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전자가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일상>, <Air>를 위시한 key 社 시리즈라면 후자는 <빙과>, <K-ON> 과 같은 작품들 이라고 보아도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중 2 병 이라도 사랑이 하고싶어>는 기존과는 달리 현실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으며, 그 안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들을 '중2병' 이라는 삶의 태도를 중심 소재로 하여 서술해 나간다. 이 작품에서 교토 애니메이션은 현실을 처음으로 어쩔 수 없는 거대한 벽으로서 작품의 전면에 내세운다. 히로인 릿카의 아버지의 죽음은 극 후반부를 끌어가는 중요한 극 중 배경이며, 릿카와 데코모리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현실을 좋든 싫든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그 속으로 통합되기를 희망한다.

이 작품에서 현실이라는 이름의 세계는 적극적으로 극 중 인물들을 압박해 들어온다. 불가시 경계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 할 수도 없다. 이 작품에는 <Kanon>의 기적이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서와 같은 판타지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어쩔 수 없는 세계가 주체로서의 개인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인물들은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혹은 '중2병' 이라는 유아적 태도를 취하며 자아 속으로 침잠하여 들어간다. 한 때 다크 플레임 마스터를 꿈꾸었던 소년은 현실을 수긍하며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치우고 아버지를 잃은 소녀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며 유아적 환상 속으로 삶을 유예시킨다.




 


(도판 1-1)
★이상☆과...






(도판 1-2)

현실...-_-; 은 시궁창



이러한 초반의 발랄하다 못해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출은 작품 후반부의 우울한 전개와 맞물려 괴리감을 낳으며, 이러한 괴리감은 역설적으로 '중2병' 이라는 개인의 상상속으로 침잠하는 삶의 태도가 얼마나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태도에 대한 비판은 나아가 <빙과>에서 표현된 삶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빙과>에서 그려지는 삶의 모습은 '삶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라는 어떤 고승의 말 처럼 현실, 즉 외부 세계와 주체의 관계에서 오로지 삶을 살아가는 개인 그 자체에만 집중하며, 그 삶이 현실과 어떻게 관계하여야 하는가에 있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그렇기에 <빙과> 에서 그려지는 인물들의 모습들은 가끔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마치 땅에 발을 딛고 있으나 별만 바라보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삶은 어쩐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극 초반과 극 후반의 괴리감을 들며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의문을 갖는 시선을 보내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대조적 분위기는 위의 도판 1-1, 1-2의 모습에서 보여지듯이 이미 극 초반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화면 구도와 연출에서부터 머릿속 망상으로 표현되는 배틀과 현실의 몸부림(...)은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전자의 빠른 템포의 장면 편집과 인물 중심의 클로즈업 샷(shot), 역동적인 조명 연출, 효과음과 달리 후자는 롱테이크로 표현되며 인물의 몸동작만이 허무하게 계속된다. 이러한 두 장면을 교차편집하여 보여줌 으로서 작품은 '중2병' 이라는 삶의 태도가 '그것만으로는' 얼마나 허무할 수 있는 것 인지를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작품은 '중2병'을 유치하고 허무하게 표현하는 것 처럼 주체에 대한 세계의 우위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작품의 주제가 담겨있는 극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작품은 현실의 무게를 내세움과 동시에 그 현실을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무엇보다 극의 후반부에 현실을 받아들이고 예전의 자신을 지우려는 릿카를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주인공인 유우타 그 자신이다. 1화 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부정하며 현실을 살아가고자 했던 주인공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결국 작품의 주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 작품의 백미이자 주제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씬은 마지막 12화의 18분55초~19분24초 까지 이어지는 장면인데, 이 장면에서 두 인물은 그간 고조된 현실 과 개인 간의 갈등을 상상이라는 추상적 공간 안에서 서로 화해시키며 고통과 번뇌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 승화된다.


 


 이 장면에서 유우타의 '중2 병'적인 행동과 모습은 중2 병으로 연결되는 기존의 '현실 부정과 개인적 사고의 절대성'이라는 상징성을 지우고 세계와 자아의 화해를 가능하게 하는 제의(祭儀)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샤먼의 신성(神聖)한 행위로서의 상징성을 새롭게 지니게 된다.

유우타가 외치는 대사와 연출이 릿카에게 기존에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그리고 이러한 환상의 공간으로 진입한다는 것이 어떤 상징적 의미로 쓰였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유우타가 지속적으로 현실에 포섭되기를 원했던 존재였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이러한 연출은 무척이나 실존적이다.

유우타는 이 장면에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저 대사를 외친다. 그 누구보다 중2병을 거부하고자 했던 그가 보여준 이러한 행위는 현실과 개인의 갈등 과정에서 릿카의 가슴 속 에 응어리 진 한(恨)을 풀어주기 위한 제의적 행위일 뿐 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 에 쌓인 한을 풀어내는 외침이기도 하다. 유우타를 중심으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면서 파도처럼 화면을 향해 터져나오는 연출은 이러한 의미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유우타로 부터 넘쳐난 검은 물결은 화면을 암전시킨 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는데, 이는 파괴와 응축, 그리고 탄생 이라는 하나의 우주적 흐름에 대한 표현으로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현실에 대하여 체념하면서도 가슴 속에서는 중2병 이라는 모습의 자아를 간직하고 있었던 유우타가 차마 부끄러워 내뱉지 못했던 대사를 온갖 과장된 몸짓과 함께 내뱉는 장면은 기존의 낡은 자신을 부수어버리는 행위이며, 릿카에게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 왔던 중2병적 행동으로서 이루고 싶었던 이상,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현실 간의 갈등을 해소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도하는 무당 혹은 제사장의 주술과 같은 외침과 몸짓이다. 그 몸짓과 '주문'을 통하여 유우타는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여 파괴하고 동시에 릿카가 찾아다녔던 불가시 경계선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단지 어선의 불빛일 뿐 이지만, 그가 그녀의 그간 행동들을 이해하고 불가시 경계선을 지시한 순간 해변과 수평선의 불빛은 그들만의 특별한 공간으로 재창조 되는 것이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긍정을 통하여, 그녀는 드디어 불가시 경계선을 만난다. 불가시 경계선은 그녀에게 다양한 상징을 지니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공간이다. 그곳은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곳 이기도 하며 동시에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이상향 이기도 하다. 아니, 그녀는 그곳에서 스스로 멀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환상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이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현실을 인정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여렸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과 개인 사이의 망설임 사이에서 마음의 응어리는 계속해서 쌓여갔고, 결국 11화 즈음 해서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체념이었지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일신하여 새로운 지평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감정의 해소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우타를 만나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우타는 11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곳에 돌아가려는 릿카에게 선뜻 다녀오라는 말을 건네지 못한다. 그녀가 자신과 같이 현실에 체념하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우타는 릿카가 있는 곳을 향해 밤을 새서 달려간다. 자신도 그녀도 그런 식으로 과거와 끝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유우타는 필사적으로 페달을 밟았던 것이다.





유우타의 도움으로 그녀는 드디어 불가시 경계선과 만나게 된다. 그곳은 항상 그녀의 마음 속에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때문에 생겨난 망설임 때문에, 그리고 특히 시간을 통한 망자에 대한 기억의 풍화라는 공포감은 그녀에게 항상 환상의 공간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들과 싸우면서 헤메이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을 때, 그녀는 유우타라는 상징적인 제사장 혹은 샤먼을 통하여 그가 만들어 낸 추상적 공간에서 그녀가 항상 아버지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을 전하게 된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교차 편집으로 지나가며 릿카가 아버지와 만나게 되는 장면은 압권이다. 이 장면은 그녀의 마음 속에 존재하였던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표현하는 은유이기도 하다. 모든 한풀이가 끝나자 불가시 경계선을 이루던 불빛들이 릿카에게 쏟아지며 눈물처럼 내린다. 그녀가 이별의 말을 외치며 아버지를 향해 뿌린 눈물에 대한 응답인듯 현실은 더 이상 그녀와 대립하지 않은 채 그렇게 형이상학적인 공간에서 그녀와 극적으로 화해하고 한은 그렇게 승화된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마치 1980년대를 풍미하던 현대작가 김창렬의 작품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무척 고무적인데, 불가시 경계선을 이루는 빛의 집합들과 김창렬 작가의 화면에 반드시 등장하는 물방울들은 이미지에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근본적으로 같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 하다.





김창렬, <현상(現象)>, 1980년대, 캔버스에 유화





                                                                                                    김창렬 (1929~ )


오랜 세월을 오직 물방울을 소재로 작업을 이어 온 김창렬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두고 일종의 고통의 승화라고 이야기 하였다.

"스무살때 6.25가 터졌어요. 전쟁중에 사체를 무수히 보면서 잔인한 기억들이 뇌리에 박혔죠.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전쟁의 상흔을 물방으로 승화시켜 보려는 의식이 제 마음속에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작가에게 있어서 물방울은 일종의 변주(variation)에 가까웠다. 저 물방울들은 사실 사람이 폭격에 맞아 갈갈이 찢겨진 모습의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회화를 통하여 당시 2차 대전 이후 유행하였던 유럽 엥포르멜 작가들처럼 거친 붓터치를 통하여 허무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삶을 이야기하는 치유의 장, 즉 제의(祭儀)적 공간으로 승화시켰다. 물방울은 작가에게 있어서 전쟁의 고통을 표현하는 눈물과 동시에 상흔을 씻어주는 신성한 빗방울 이었다.

릿카가 마지막에 빛의 소나기에 휩싸이는 것 역시 이와 유사한 이미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김창렬 작가의 물방울이 고통의 승화와 치유라는 기복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 처럼 그녀가 흘린 눈물은 한(限)의 승화를, 불가시 경계선에서 내리는 빛의 소나기는 이러한 한의 승화에 따른 고통과 번뇌의 치유와 주체와 세계 간의 화해의 이미지로 읽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제의가 끝난 해변은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현실은 현실 그 자체로 그 자리에 서 있다. 두 사람의 뒷모습만이 방금 전에 있었던 현실과 개인의 화해와 승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화면 안의 두 사람은 이 일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보편적인 물리현상으로서 존재하는 현실은 그렇게 주관적인 의미를 갖게 되며 인간은 특정 장소를 통하여 삶을 현실과 화해시킨다.

유우타와 릿카는 이 장면에서 진정으로 중2 병을 졸업한다. 여기서 중2 병이란 중2 병 적 행동이 아닌 중2병 적 사고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에 대하여 자아의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망상속으로 빠져들려는 마음 속의 충동을 청산한다. 반대로 자신을 현실에 매몰시키고 자아의 문제를 외부 세계에 던져버리려는 무책임한 태도 또한 씻어버린다. 삶은 언제나 자아와 세계 간의 긴장과 관계의 조율로서 이루어지는 현상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와 주체는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갈등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 현실은 부정 할 수도, 무시 할 수도 없는 어쩔 수 없이 안고가야 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그 삶 속에서 자신을 지워버리고 현실만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세계 와 주체 간의 화해와 상생이다.


 이 작품은 중2병을 단순한 얘들 장난이나 사회부적응자 들의 엉뚱한 장난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사람을 들여다보고 현실과 개인으로 대표되는 세계와 주체 간의 실존적 관계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통하여 주제로서 전달한다. 이들에게 중2병과 중2병적 행위는 세계와 자신 간의 간극을 좁히려는 제의적 행위였다.

제의는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물리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신을 찾거나 혹은 개인/사회적인 미신적 행위를 철저하게 지키곤 한다. 이러한 행위는 근본적으로 이해하거나 저항 할 수 없는 현실 안 에서 인간의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충돌 할 때 생겨난다. 그렇기에 삶이 어려울 때 사람들은 형이상학적인 무언가에 기대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나아가 제의를 통하여 그러한 마음을 실체화 시킴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결국 제의는 철저하게 인간적 중심적인 행위인 것이다.

이 작품의 인물들 역시 그렇다. 유우타나 신카, 릿카, 데코모리 모두 비현실적인 인물은 아니다. 특히 12화 중반에 보여준 데코모리의 모습은 작 중 인물들 중 그 누구보다도 평범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몽상가도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그 누구보다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가려는 인물들이다. 자아와 현실의 충돌이 존재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자신과 현실의 관계를 더 많이 고민한다. 이러한 인물의 모습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중2병 환자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잊으려는 이유로 중2병적 행위를 하였다고 보기 보다는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심리에서 발현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중2 병 적 행위는 중2 병 적 삶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결과물이 아닌 일종의 소망의 결과물이며 그렇기에 그들의 중2 병 적 행위는 제의적 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과 실천이 단지 중2병 이라는 제의적 행위로만 끝나서는 안된다. 제의는 단지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논에 물을 댈 현실적인 방법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백날 기우제를 지내 본 들 결과는 굶어 죽는 것 뿐이다. 이처럼 삶은 개인적인 관념의 세계를 벗어나 외부 세계를 향해 한 발을 구체적으로 내 딛을 때 만이 이루어진다. 단지 제의만을 치루는 것은 삶을 유예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제자리걸음이 아닌 앞을 향하는 실천이다.

교토 애니메이션은 이 작품을 통하여 진정한 삶은 구체적 현실과 자아가 함께 상생할 때 만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그간 교토 애니메이션이 섬세한 작화와 사실적인 조명, 치밀한 로케이션 헌팅을 통하여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스펙타클의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는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에는 <K-ON> 에서 보았던 동화적인 현실도,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일상>, <key 社 serise>에서 표현 된 비현실적인 설정도, <빙과>에서 보았던 철저하게 인식론적인 삶의 태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는 오로지 단단한 현실이 있고, 그것과 갈등하며 고민하고 밀어내지만 결국에는 현실과 자아 간의 화해를 이루어내며 상생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실존적 개인들의 연대(連帶)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작품, <중2병 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를 통하여 교토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작화나 동화만 뛰어난 회사에서 벗어나 현실에 대하여 고민하고 그것을 작품을 통하여 절제된 표현으로 표현 해 낼 줄 아는 회사로 거듭났다.

나는 그간 교토 애니메이션에 대하여 항상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환상을 통하여 현실을 소외시키는 회사로 취급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본인의 태도 또한 바뀌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리고 본인은 이러한 현실 너무나 기뻐 참을 수가 없다. 앞으로의 교토 애니메이션의 행보가 기대된다.

2011년 본인의 작업에 대한 분석 +작품들+




<2012년 11월>, 2011, 캔버스에 유화, 116x80cm




<강변에서>, 2011, 캔버스에 유화, 24x34cm


 

 모든 표현은 절제되어야 한다. 이성에 치우쳐서도, 감성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 그러니까 본인의 작업은 이를테면 ‘고고한 절규’가 아니면 용납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주관적 기질에 따른 세계 인식 따위가 아니다. 지금의 세계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이 그렇다고 생각하기에, 그리고 예술은 항상 동시성을 품어야 한다는 강녕 아래 형성된 작가적 태도이다.
 

본인은 현실의 표상적 현실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반영하지 않고 점차 은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의 중심을 대표하는 도시 서울은 세계화, 선진화라는 이념 아래 낙후되거나 더러운 것, 즉 ‘타자’를 철저하게 배제시키는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성은 완벽하고 매끄러우며 세련된 마천루와 잘 정비된 도로, 깔끔한 거리 환경을 통하여 철저하게 은폐되고 대신 아름다운 환영들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이것은 마치 현실보다 더 아름답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 리얼리티’를 현현시키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까지 보이기도 한다. 마치 “우리의 삶은 이렇게 아름답고 합리적입니다”라고 떠드는 TV 속의 정부관계자의 모습을 보는 것 과 같이, 도시는 그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환영을 최대한 구현하려 몸부림친다.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우리는 그 환상이 진실한 삶의 모습인 것 마냥, 그것에 가까워지려 애를 쓴다.

그렇게 우리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우리 결혼 했어요’를 보며 아이돌의 가상 결혼 생활이 자신의 행복인 것 마냥 히히덕대며 현실의 여성 대신 일본산 뽕빨물 애니메이션의 2차원 여성과 그녀의 속옷을 보며 각자의 입맛에 맞는 환상 속으로 그렇게 빨려 들어간다. 이러한 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어떤 차이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사회는 결과적으로 다양한 부류의 인간들을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점으로 모아 무의미한 덩어리로서 집합시켜 버린다. 무엇을 소비하던, 결국 우리는 표상적으로 다양한 취향의 환상을 소비 할 뿐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유아적인 실존적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소리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오시이 마모루’와 그의 영향을 받은 ‘미즈시마 츠토무’는 이미 현대사회의 양대 구조인 스펙터클과 시뮬라크르를 인간 실존에 대한 인식을 차단하는 베일 혹은 차양막으로 표현하며 현대 사회 구조의 폭력성을 비판 한 바 있다. 이미 이러한 환상성에 대한 거부적 움직임은 ‘인상주의’의 ‘마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네는 기존의 일점투시를 이용한 방법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며 현실을 관습적 방식이 아닌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파악하여 화폭에 옮기려 시도한 기념비적인 작가이다.



 그의 작품 ‘발코니’는 마네가 단지 현실의 표현에 있어서 그가 자신의 시대와 삶의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의 형식이 단순한 시각적 실험이라고 이해하기 쉬우나, 아래의 도판에서 보듯이 인물들은 발코니라는 좁은 공간 아래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세계 안에 갇혀 있는 듯 보인다. 시선 처리부터 포즈, 표정 전부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네가 세계를 하나의 시점 아래 통일하여 재현하는 방법인 일점투시법과 렘브란트식의 인위적인 조명 설정을 제거함으로서 오히려 더욱 사실적인 회화를 만들어냈던 결과의 원인에서 그 이유 찾을 수 있다.





에두아르 마네, <발코니>, 1868~69년, 캔버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마네에게 있어서 형식은 단순한 시각적 실험이 아닌,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그는 현대의 사회구조적 특징을 이해하고 이를 독창적인 형식으로 표현하려 한 작가였다. 철저한 현실인식과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서 인식된 세계를 재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마네는 인상주의 화가라고 불리기 이전에 ‘최초의 현대예술가이자 리얼리스트’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렇듯 마네의 예술적 태도는 본인의 예술이 기본적으로 취하고자 하는 리얼리즘적 태도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예술은 동시대를 살고자 하는 철저한 실존적 태도이며 그것은 언제나 그것만을 위한 최적의 표현을 통해 이야기되어야 한다. 각자의 사상에는 언제나 각자만을 위한 코트가 존재하는 법이다.


이렇듯 ‘인상주의’가 다져놓은 현대미술의 토양은 후기인상주의와 야수파, 표현주의를 지나며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 이르러 기존의 관념을 철저히 부정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급진적인 미술 사조를 낳게 된다. 다다이즘이 예술 작품이라는 오브제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던 예술 개념 자체에 대한 관념을 부정함으로서 전통에 대한 부정을 표현하였다면,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를 필두로 한 심리학에 영향을 받아 확고한 자아라는 근대적 개념에 물음을 던졌다. 특히 표현주의는 형상의 표현이라는 회화의 전통적 관념을 파괴하며 개인의 세계 인식과 그것의 표현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움직임은 후에 추상회화와 추상표현주의를 낳게 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서 특히 눈 여겨 봐야 하는 운동은 초현실주의 중 마그리트, 조르주 드 기리코, 살바도르 달리 등 형상을 이용하되 이미지가 가진 상징성의 이질적 배치를 통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인식에 혼돈을 주어 현실에 대하여 전혀 새로운 이해를 이끌어내는 ‘데페이즈망’ 방식인데, ‘감각적 외형을 통한 세계에 대한 개념의 구축’이라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현실 인식 방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역설적으로 현실을 가장 기이한 것으로 만드는 그 ‘위트’는 데칼코마니, 프로타주 등 통제의 대상인 신체를 우연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다른 초현실주의 표현방식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전자가 개념 간 의 충돌을 통하여 인간의 세계 이해의 방식인 ‘인식과 개념’을 뒤틀어버림 으로서 관람자를 기이한 세계로 초대하기는 하지만, 외부 대상으로서의 세계와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을 해체하지는 않았다면, 후자는 아예 주체로서의 인간을 버리고 ‘우연성’ 이라는 세계의 비표상적 움직임 속으로 자신을 던져버림 으로서 자아와 세계 간 의 이분법적 관계를 해체시키려는 시도를 보인다. 특히 이러한 방법은 추상표현주의 중 액션페인팅과 같은 작업 방식에 영향을 주어 후일 해프닝과 행위예술을 탄생시키는 전초를 마련한다.


그러나 본인은 세계와 인간은 엄연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언제나 세계 속에서 살아감과 동시에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실천적인 존재이다. 특히 70년대 한국 단색화 운동이 회화의 평면 공간을 세계와 자아의 내파 지점으로 설정함으로서 현실을 부정하고 이분법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 하였으나 역설적으로 그 평면 공간 안으로 스스로를 제한시키고 결국에는 회화 공간 자체를 폐쇄적인 논리공간으로 변모시켰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는 점을 상기시켜 본다면, 단지 이러한 세계-주체 간의 이분법적 논리를 부정하는 방법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본인의 작업에서 현실적 공간과 대상은 상호 간 기이하게 왜곡되거나 화면의 면 분할을 통하여 현실적인 풍경을 어딘지 모르게 기이하게 바꾸어놓는다. 이 애매모호함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본인의 회화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익숙한 풍경과 소재의 형상을 통하여 감정을 이입시키려는 시도와 동시에 회화적인 붓 터치와 색채, 상호 간의 이질적인 크기와 화면 공간의 구성을 통하여 회화가 도상적 기호로서 읽히는 것을 방지하고 일반적 개념과 감정을 환기시키려는 감상자의 인식 과정을 방해한다.

본인의 작업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상징적 기호의 철저한 비현실적 혼재를 통하여 근대적 자아의 통일성, 확실성을 비판하고자 하였다는 점 과 다르게,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하여 결과적으로는 삶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것에 역점을 둔다. 특히 형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 초현실주의자들과 본인은 차이를 보이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형상은 인간의 인식작용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비꼬기 위해 사용되는 ‘하나의 기호’에 불과하였지만 본인에게는 현실에 대한 철저한 접근과 이해, 그리고 이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일종의 통로와도 같다. 본인은 형상으로 대표되는 세계에 대한 감성적 접근 가능성을 배제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감성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애정을 통하여 진정한 삶의 모습을 발견 하고 자신의 삶의 모습을 찾아나가게 만드는 중요한 충동인 것이다. 이러한 ‘형상충동’은 자연을 이해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행위와 맞닿아있다.


특히 1980년대 한국 신형상회화의 물결은 세계에 대한 관심이 산업화 과정에서 밀려난 표상적 대상에 대한 애정, 즉 형상과 물질에 대한 관심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 이라는 점은 형상과 물질의 힘에 대한 본인의 생각에 더욱 확신을 더해준다. 인간은 피와 살, 뼈를 가진 물질적인 존재이며 감각을 통하여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특히 시각을 통한 물질과 형상의 인식과 이해는 인간의 추상적 사고능력 만큼이나 인간의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형상을 통한 주변 사물에 대한 애정은 사물에 대한 세밀한 묘사로서 드러나기도 하며,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의미 부여와 공간 설정을 통한 의미 변화를 통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주변 사물에 대한 애정과 감정 이입은 작업을 통하여 결과적으로는 작가가 몸 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실천적 과정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형상에 대한 관심과 사물에 대한 애정, 그린다는 행동의 참여적, 실천적 성격은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본인은 지금 시대가 이미지의 시대라는 것도, 물질적인 시대라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는다. 예술은 언제나 동시대를 이야기 하여야 하는 참여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인간이 지닌 인식 능력의 한 측면을 버리고 다시 추상적 세계 이해라는 영역으로 탈주함으로서 과거의 폐쇄적인 자아도취적 예술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예술은 그 시대와 감수성에 맞는 자신만의 옷을 항상 찾아야 하는 리얼리즘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

오히려 형상과 물질에 대한 인식 방법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현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방법으로서 이미지와 물질의 최대 장점인 즉물성에 기초한 직관성을 이용하고 싶은 것이다. 작품의 화면 안에 그려진 현실과 재현 대상 간의 애매모호하며 이질적인 관계는 회화가 단지 상표마크와 같이 기호화 되어 습관적으로 읽히는 것을 방해할 것이며, 관람자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일으키도록 유도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감수성의 형성은 인식 주체가 내파되는 것이 아닌 오히려 확고하게 서 있을 때 만 의미가 있으며, 익숙한 현실에 대한 뒤틀린 재현은 삶을 습관적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 아닌 삶 자체를 인식 할 수 있는 균열을 만드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본인의 회화는 관람자에게 실존적 삶의 가능성을 제공 할 때 그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1980년대 미술문화의 전개 +오늘의 修學+



1980년대 미술문화의 전개




오광수, 『한국현대미술사』, 열화당, 2000(이하 ‘한’으로 약칭)

오광수, 『시대와 한국미술』, 미진사, 2007(이하 ‘시대’로 약칭)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한국현대예술사대계 ⋁, 시공사, 2005(이하 ‘예’로 약칭)

임지인, 『한국미술에 있어서 리얼리즘 소통 방식의 연구, 전남대 대학원, 2009(이하 ‘한국리얼’로 약칭)

이호진,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대학원, 2008(이하 ‘포스트’로 약칭)

린다 노클린, 권원순 역『리얼리즘, 미진사, 1986(이하 ‘리얼’로 약칭)

서성록, 『한국의 현대미술』, 문예출판사, 1994(이하 ‘한국현대’로 약칭)

김홍희, 『한국 화단과 현대미술』, 눈빛, 2003(이하 ‘한국화단’으로 약칭)

황하연, 『한국 신형상화화와 리얼리티』, 홍익대 대학원, 2007(이하 ‘신형상’으로 약칭)

김복영, 『눈과 정신』, 한길아트, 2006(이하 ‘눈’으로 약칭)

김복영, 『서술로서의 표현의 의지, 1988(이하 ‘서술’로 약칭)

임지민, 『한국미술에 있어서 리얼리즘 소통방식에 관한 연구 : 이종구, 최병수의 작품을 중심으로』, 2009, 8 (이하 ‘소통’으로 약칭)



Ⅱ. 문제제기

1:1980년대의 미술 경향의 구축에 영향을 미친 환경적 요소들은 무엇인가?

2:1980년대 미술계의 전반적인 성향과 흐름은 어떠하였는가?

3:1980년대의 미술 조류들은 무엇이 있으며 태동하게 된 요인과 전개의 과정, 전반적인 성격은 어떠하였는가?



Ⅲ. 본론



1.1980년대 미술문화의 환경적 요소들

(1)1980년대 한국 미술문화의 사회적 동인들

1980년대는 국제적으로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던 연대로 색채지울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는 월남전 이후의 무기력 상태와 아프간 사태를 통해 나타난 힘의 정의의 불균형, 여기에다 끊임없는 핵공포가 가져오는 심리적 긴장상태가 만연되었던 시기였다. 유럽제극이 탈미국적 현상이 다른 한편으로는 가속되면서 문화에 있어 이른바 다원주의이 꽃을 가꾸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여기에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 역시 격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 뒤이은 신군부에 의한 쿠데타 등 숨가쁜 고비를 맞고 있었다. 억압의 민주화의 열망이 엇갈리면서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한,224p)


(2)미술계의 구조적 환경의 변화

1980년대 미술의 변화의 가장 큰 변화는 미술계를 구성하는 인적 자원의 구성 변동과 국제적 교류의 가속화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부터 서울 뿐 아니라 각 지방에 많은 미술 교육관이 증설되었다. 그 전에는 서울에만 모여 있었고 그것도 몇몇 대학에만 미술 계열이 존재했지만, 1970년대엔 서울과 지방의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 미술과가 신설되어 많은 신진들을 길러내었다.(시대, 180p)


그리고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미술인구의 증폭은 기존의 기성세력과 신진세력을 나누는 세대 간의 갈등구조로 표면화 되었다. 1980년대의 문화 현상 가운데 가장 현저하게 목격할 수 있는 제도권과 민중권 이라는 도식은 그 원인이 어떠한 복잡한 내역으로 짜여 져 있던 상관없이 일단은 세대 간의 갈등구조로 먼저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시대, 180p)


그러나 이러한 구성원 간의 변화와 가치간의 충돌은 단지 표면적인 교육기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정치적 성격의 알력다툼이 아닌 급격한 산업화와 사회 변동이 이 시대의 신진세력과 매체의 변화가 사회 내에서 미술이 가지는 인식에 대하여 미친 영향에서 일차적으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선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미와 예술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미술계의 양적 팽창과 질적 분화가 큰 폭으로 이루어졌다. 미술품은 단지 사적 취미의 대상으로서 완상되거나 친교의 징표로서 주고받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언표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혹은 경제적 재화나 교환가치로서 현실적인 힘을 갖는 것이 되었다. 미술관이나 화랑 개설 붐, 미술 전문 잡지와 출판의 정착, 각 일간지와 저널의 미술 관계 지면의 확대, 컬러 TV 방영 등에 힘입어 미술 대중이 획기적으로 팽창했다. 많은 화랑의 개설로 작품 유통이 확대되었다. 신문 • 잡지 등 정기간행물, TV, 인터넷 등 미술문화와 관련된 일련의 매체 환경이 현격하게 달라졌다. 대형 국제전의 개최로 국외 부문이 크게 팽창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학자, 미술사가,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미술 전문 기자 등 미술계 안에 직접 작품 생산자와는 다른 부류의 미술 전문가 집단이 대두되고 미술문화의 매개자나 수용자 집단은 미술계의 주변부가 아닌 중심부에서 또 다른 문화 생산 주체로서 급격히 부상했다.(예, 280p)


특히 국제적 교류의 가속화는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또 다른 중요 변동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제 5공화국 정권은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의 허술함을 미학의 정치화로 무마하고자 하는 시도와 동시에 국내 민심과 국제적 여론에 대한 유화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해외여행 및 유학 자유화, 정권 초기의 개혁 개방 조치나 서울 올림픽 유치 결정, 그리고 이에 따른 아시안게임의 유치는 그 대표적인 예 이다.(예, 281p)


이러한 국제적 교류의 가속화가 가져온 대형 스포츠 행사는 부가적으로 대규모 국제 미술전의 유치와 전람회를 가져왔는데, 국립현대미술관《아시아현대미술전》, 《세계현대회화전》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새롭게 등장한 사설 미술관들 역시 국제적인 미술 교류의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한국 작가들의 해외전시가 본격화 기 시작하였다. 이렇듯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미술이 피식민 의식을 떨치고 세계 미술이 지형도 안에 본격적으로 배치되거나 세계 미술시장 안에서 일정한 위상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이다.(예, 282p)



2.1980년대 미술문화의 경향-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가깝게는 70년대를 풍미한 백색 모노크롬 회화로, 멀게는 1930년대 후반 추상미술과 1950년대 말 앵포르멜 운동으로 대표되는 한국적 모더니즘은 한국적 민족성의 탐구와 조형적 표현 이라는 입장에서는 얼마간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반대로 예술이 실제적인 삶과 멀어지고 관념화 되어 예술계가 엘리트주의적 성향으로 치우치게 되는 발단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형상성의 복권과 강렬한 정치성의 표현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반동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20년에 가까운 유신독재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저격으로 일단락 된 후, 민주주의 도래를 기대하였던 시민사회에 있어서 전두환의 12.12 사태와 이후 이어지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무참히 가해진 폭력은 더 이상 미술의 관심을 형이상학적 관념의 세계에서 머무를 수 없게 만들었다.


온갖 서사나 발언을 무화시키며 백색을 하나의 ‘빛깔 이상이 것’, ‘하나의 정신’, ‘우주’, ‘스스로를 구현하는 모든 가능의 생성의 마당’이라고 하는 현학적 태도와 회화를 평면으로 환원해가고자 했던 서구 모더니스트 페인팅의 관심사가 교차되는 장소에 자리 잡고 있던 이른바 백색 단색주의에서 벗어나 급변하는 국내외 정치 • 사회 • 경제 상황이나, 유신군사독재체제가 빚어내고 있던 체재 내 갈등과 피로감, 그리고 격동하는 사회 현실은 그 나름의 표상방식을 요청하고 있었다.(예, 285p)


리얼리즘의 창작 방식을 일정한 원리로 제시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는 현실성 또는 당대의 시대성에 충실하다는 것 이다. 이것은 리얼리즘 예술론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은 예술가가 동시대성을 실현하는 길은 세 가지며, 첫째로 그 시대의 이상과 열망 등을 전통적인 미술과 문학이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수사로 표현하는 것 이다. 둘째로 동시대성은 그 시대의 특질을 이루는 구체적인 경험, 사건, 풍속, 모습 등과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그리고 당대적인 것을 실제로는 그 시대를 선행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 태도로 이것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에서 만연한 동시대성에 대한 신비한 개념이라고 했다.(리얼, 115~122p)


이러한 리얼리즘에 대한 기본설명은, 1980년대의 미술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약진을 보이고 있는 형상성의 복권이 현실 참여라는 리얼리즘의 기본 정신과 동시대의 민중운동 이라는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적 경향, 기존까지 이어져 온 형이상학적 관념 회화에 대한 반동과 함께 어우러져 신표현주의 와 극사실주의, 민중미술 진영에서 어떻게 급격하게 대두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특히 이 같은 표현의 회복은 경험적인 사고에 물질의 새로운 존재의미를 추구하는 일련의 물질 실험의 양상으로도 발전되었다. 따라서 1980년대 미술의 전반의 풍경은 대체로 드로잉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 발전, 민주화의 열기와 연대된 현장주의 미술의 출현, 표현의 회복으로서의 폭넓은 매체의 원용과 실험 등으로 점경 된다. 그러면서도 현장주의로 대변되는 민중미술이 기존의 미술계를 공격 대상으로 삼아 그 입지를 강화함으로서 이른바 제도권 미술과 민중미술의 대립 • 갈등이 심화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현, 245p)


이렇듯 리얼리즘의 물결을 타고 본격화 된 반모더니즘은 ‘삶의 미술’을 내세우며 현실참여, 사회에 대한 직접적 비판, 산업사회의 소외된 인간에 주목했다면, 탈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극복을 기조로 삼아 예술을 사회, 역사, 문명과 꾸준히 연결 지으려 했다.(한국현대,225p)


1980년대 중순을 기점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은 모더니즘을 기본 축으로 가정하여 형식화한 추상미술, 권력화 한 미술제도 등 모더니즘의 효과를 비판하고 공격하고 서사적 리얼리즘을 지향한 ‘반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용으로서 다원주의를 표방한 ‘탈모더니즘’으로 구분할 수 있다.(한국현대, 216p)

이들의 미적 경향이 비록 완전한 형태의 것은 아니었을 지라도 정치적으로 민주화 이행과 더불어 과거의 권위적 질서 속에 동반될 수밖에 없었던 획일적 독선적 문화논리를 재평가 하였고 이와 함께 배제되었던 미적 가치의 부분들을 새로운 자세로 인식하게 되었다.(한국현대, 223p)


특히 1980년대 작가들은 전시대의 추상지상주의, 매체적 획일주의, 미학적 순수주의에 대항하는 반모던적 양식과 더불어 매체와 장르의 다원화, 가치의 복수화를 표방하는 탈모더니즘적 성향으로 90년대 한국 포스토모던의 싹을 틔우게 된다.(한국화단, 29p)



3.1980년대 미술문화의 조류


(1)신표현주의: 극사실회화


앞서 언급하였듯이, 1980년대 미술은 경향적으로 생활세계에 대한 서술과 표현을 지향하였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 전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1980년대 미술은 그 방식에 있어서 다원화 되었던 시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하나는 ‘평면과 입체의 후기 양상’과 표현의 새로운 ‘감수성’으로, 사회와 세계에 관심을 보이고 삶 자체에 대한 근본 문제를 풀기 위해 현실과의 관계를 모색하여 인간의 총체적인 삶을 서술하고자 하였다.(눈, 68p)


다른 하나는 민중미술계열을 중심으로 ‘서사적 리얼리즘’이 보여주는 민중 • 민족주의에 기초한 진보주의적 미술이념이다. 이들은 미술을 어둡고 소외된 현실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양식을 차용하거나 한국의 전통도상을 빌려 고단한 민중의 현실생활과 사화문제를 고발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눈, 68p)


이처럼 아주 상반된, 크게 두 가지의 경향의 섞일 수 없는 미술의 이념을 보면, 한쪽에서는 현실적 지평을 새롭게 모색하는 데 경도되었다면, 다른 한 쪽에서는 오직 민중적 현실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에만 역점을 두었다. 전자가 순수한 창조에만 목적을 갖는다면, 후자는 이론과 해체에 목표를 둔다.(신형상,56p) 특히 감수성은 기존의 탈자아, 익명화된 주체의 표현에서 벗어나 자아와 세계 간의 관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표현의 새로운 ‘감수성’은 적어도 세 가지 유형을 보였는데, 그 하나는 인간을 주제로 소통을 강조하는 표현적 형상의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형상에 의한 표현보다는 표현 자체의 정신적 • 물질적 현실의 주제들에 더 많이 관심을 두면서 행위와 세계의 만남을 시도하는 인스톨레이션(설치) 양식이 경우이며, 마지막은 전통 한국화와 관련된 새로운 감수성을 실험하는 경향으로 나뉘었다. 이 경향들은 1980년대의 감수성과 접목된 새 감성양식을 발전시키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양식들 -‘후기양상’, ‘감수성’, ‘민중미술’- 가운데, 표현의 새로운 감수성 운동은 신형상회화의 이념이라고도 할 있는데, ‘후기양상’이 자연과 자아의 내재성의 연속선상에서 사회와의 연계성을 지향했다면, 표현의 새로운 감수성은 1980년대에 확산 된 표현적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미술의 자생적 가치를 발굴하려는 산발적인 운동이었다. 그들은 사회, 자연과 자아를 포함한 종합적 수준에서 미술과 사회의 연계성을 강조하였다. 또 이들은 새로운 감수성에 목표를 둠으로써, 민중미술과도 차이를 보였다. 가령 민중미술이 민족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열렬히 지향했다는 사실과 비교할 때, ‘감수성’은 이데올로기를 수반하지 않은 자유로운 입장에서 감수성의 표출을 모색했다.(눈, 71p)


감수성은
개인으로부터 사회에 이르는 삶과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감수성을 표출했다. 바로 이 점에서 감수성은 ‘후기양상’과 유사한 면모를 갖고 있지만, 보다 더 넓고 자유로운 입장이다.(신형상, 57p) 이러한 움직임은 사실 70년대 후반부터 있어왔는데, 1978년에 여러 신진 작가들에 의해 개최된 《전후세대의 사실주의란》,《형상78》,《사실과 현실》,《시각과 메시지》같은 일련의 소 그룹전에 참여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은, 급변해가는 정치 • 사회적 현실, 도시 등 인간의 현실적인 삶이 문제를 중심과제로 끌어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선전 • 국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종래의 구상미술과는 거리를 유지한다. 그리고 시각 자체이 구조적인 가능성과 한계를 따지며, 회화의 평면성의 문제 등 모더니즘의 유산을 계승하며 ‘새로운 형상성’을 추구한다.(예, 286p)


이렇듯 형상성의 복권은 삶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밀접하게 관련 되어있다. 사실 이러한 형상에 대한 관심은 시대적, 사회적 구성의 변화에 따른 삶의 변화 외에도 국제 미술 동향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 중 하나는 모더니즘 작가들에서 새롭게 자각되기 시작한 드로잉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모색에서 비롯된다. 그리기와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백색 모노크롬 작가들이 설정해놓은 논리적 폐쇄 회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형상성을 추구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무엇보다 더욱 직접적인 영향은 1960년대 이래의 대중문화의 확산 속에서 미술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새로운 재현적 경향의 회화들 예컨대, 팝아트, 포토 리얼리즘, 하이퍼리얼리즘 등 유행 사조의 수용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생활이 하찮은 일상을 실물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하게 정밀 묘사하는 당시 대세를 이루던 극사실주의적인 경향의 작가들에게서 잘 확인된다. 김강용의 시멘트벽돌, 김창영이 모래밭, 변종곤의 타이프라이터, 이석주의 실내, 주태석의 철로, 지석철의 소파 쿠션 등이 좋은 예이다.(예,286~287p)


그렇지만, 이러한 형상 욕구를 서구 유행사조의 추수로만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경향은 대중문화가 일반화되어가던 당시의 시각 경험이나 시대감각이 산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지 기법적으로 극사실성에의 집착을 넘어서 보도블럭이나 철길의 단면, 집적된 벽돌이나 블록의 클로즈업, 삼류극장의 낡은 포스터가 붙어있는 문짝, 지하철 공사장 칸막이, 석유 드럼통 등 그들이 그리고 있는 형상들은 이미 대중문화 사회 속의 일상의 소외와 분열을 리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관념성에서 떠나 경험적 현실성으로서의 관심의 이동이며, 그런 점에서 표현이 자유롭지 못한 유신체제 아래서 전개된 형상성의 복원이야말로 삶의 현실로 향하는 징검다리가 되고 있다.(예, 287p)


(2)민중미술


민중미술은 신표현주의 미술과 그 흐름을 같이하나, 그 강렬한 이데올로기적, 현실 참여적 성격과 사상 전달을 위한 수단적 성격으로 인하여 위의 신표현주의 와는 구분된다.


위의 새로운 ‘감수성’은 ‘주관주의적 경향’, ‘현실 체험’, ‘자아’에 관련된 의식을 형상화라는 재현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이들에게 형상성은 기존의 모더니즘의 특징이던 ‘물성’, ‘환원’, ‘손의 상실’의 구조가 아니라 ‘표상’, ‘확산’, ‘손의 회복’등 생활 세계, 현실이 강조됨으로서 작가가 작품에 내재 • 은폐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화자로 등장하였다.(신형상, 53p)


이러한 사실은 점차 작가 자신의 주체를 강조하게 됨은 물론, 인격적 • 윤리적 관심의 고조를 동반하게 되고(서술, 165~171p) 70년대의 고립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합적’개인으로서 사회 내에 존재하고 사회와의 연대를 통하여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사회에 있어서 역동적 기능자로서 이해하며, 예술을 자연과 자아의 세계로부터 확장해서 사회 속에서의 세계, 간단히 말해 ‘생활 세계’, 현실로 눈과 마음을 돌렸다고 할 수 있다.(눈, 62p)


이렇듯 앞의 극사실회화, 신표현주의는 형이상학적인 거대 담론 보다는 다양성, 다원화를 바탕으로 삶의 세계 내부에서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들 -역사, 종교, 민족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해체 하거나 ‘새로운 감수성’을 구축함으로서 진정한 자유로운 삶의 모습을 꿈꾸는 미술 운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정치 • 사회적인 흐름은 이러한 형상성의 복권을 통한 억압된 자아의 해방과 자유를 누리기에는 시대적으로 적절치 못하였다. 10여년에 걸친 고도성장기의 종말과 오일쇼크의 등으로 인한 생산력 감소가 사회에 그늘을 드리웠고, 정치적으로는 YH 사건, 김영삼 신민당수 국회 제명에 이은 10.26 사태, 그리고 12.12 쿠데타에 이은 광주민주화항쟁 등으로 이어지며 혼란기를 이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형상성’에 대한 관심은 이제 단순히 이미지나 혹은 일루젼의 복권이라고 하는 미학적 차원의 문제로 머물지 않았다. 특히 12.12 쿠데타나 광주민주화항쟁 등과 같은 체험은 정치적 위기의식을 전면화 시켜 민족적 정서나 극사실주의, 초현실주의 기법 등 일루젼의 문제에 기대는 것 만 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모더니즘적 형식논리나 미에 관한 추상적인 관념성, 더 나아가 중성적인 형상성마저 더 이상 유효성을 지니기 힘들게 되었다.(예, 288p)


민중미술은 초기 소그룹 운동으로 진행되었는데, 80년대 전반기의 경우 대체로 70년대를 극복한다는 측면이 강조된 시기로 이른바 제도권 미술과 민중권 미술의 대립이 첨예화 되었던 시기로 진단한다. 후반은 모더니즘의 후기적 양상이나 민중적 이미지의 예술에서 그 나름의 형식적인 점검이 활발히 전개된 시기로 평가해볼 수 있다. 막연한 민중미술의 형식이 구체적인 매체로 부각되었으며, 미술은 선전, 선동의 수단화로서 뚜렷한 색채를 드러내었다.(시대, 186p)


1980년대 전반의 소그룹 중심이 현실 재현적인 경향의 작업들은 처음에는 시각예술이 언어성을 회복하는 데 눈을 두었으나 점차 현실 변혁적인 성격을 띠며 전개되면서 미술인들과 전두환 정관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인들에 대한 탄압은 예기치 않게 일반 대중들에게 까지도 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러일으켰다. 1980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러한 흐름은 민족미술협의회,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이라고 하는 민중 • 미술운동에 대한 거대한 전국적인 조직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으나 긍정적인 성과에도 불고하고 70년대에 경험했던 집단적 획일성을 미술계에 다시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들이 활동은 계급성, 전투성, 대중성을 강조하는 조직 결성을 통해 획일적 단일 행동 대오를 형성하며 체계적인 조직 활동을 가능하게 하였지만 기존의 한국미술협회 와의 대결 구도 속에 미술계의 주요 이슈가 조직과 파당, 정치, 헤게모니 싸움으로 집중되는 부작용 또한 가져오고 말았다.


민중미술은 일종의 현장 그림인 걸개그림, 대중의 교화 수단이나 소통의 방편인 만화, 설명적 그림 등 새로운 형식을 제작해내었고 그것들이 집회나 데모의 현장에 설치되며 그 기능이 점검되었다. 내용면에서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하고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지며, 소재적인 한계, 형식적 완성도에 있어서도 문제가 뚜렷하지만(시대, 186p) 기존의 형식과 관념, 제도권에서 이탈하여 미술의 참여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걸개그림의 경우 민중미술의 흐름 중 현장미술이라는 흐름을 타고 시도 되었는데, 현장미술은 계급모순과 민족 모순에 대한 각성을 표출하는 방식이나 장소의 문제이기도 했다. (소통, 57p)


걸개그림은 공동창작에 의해 기획, 제작되며 당시 많은 소규모 동인들에 의해 제작되었며 현장성, 특히 광장에서의 소통을 목적으로 제작된다. 걸개그림은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의 외침이기 때문에 공간귀속성 적 특징을 가지며, 그 공간에 있는 민중들에게 단일대오로서의 외침을 형성한다. 이러한 걸개그림들은 집회 장소의 청각적 언어를 이미지화 시켜 시각언어로 응집시킨다. 이러한 걸개그림은 선전 선동적인 특징을 가지며 그렇기에 그 자체로는 미학적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걸개그림의 미학적 가치는 더 많은 민중들과 더불어 하나의 외침을 만들어 낼 때이다.(소통, 60~61p)


현장미술은 세 가지 지향점을 드러내는데, 첫쨰, 변화한 상황에서 현장미술은 장소의 범주로 국한할 문제가 아니라, 상황으로서 현실에 문화적 개입을 통해 현장성을 획득한다. 둘째, 전시장 공간을 담론의 생산과 실현의 장으로 확장한다는 점이다. 셋째, 특정이슈와 특정 장소가 정확히 만나는 이상적인 상황에서 현장미술은 물리적인 공간으로서 현장과 그 지점의 이슈가 참여미술의 형태로 나타나 전향적인 양상의 현장미술이 가능하다는 점이다.(소통, 58)


(3)신매체미술


1980년대의 시각문화 환경의 변화와 신매체의 등장은 평면회화 중심의 1970년대 후반 미술과는 다른 매체 측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타라는 설치미술 장르를 본격적으로 개척 함으로서 1970년대 단색주의 미술이 지닌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민족과 민중의 기반 위에서 소통 가능성을 모색한 소그룹 ‘두렁’ 역시 전통 매체의 실험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예, 303p)

메타복스 와 난지도는 이른바 ‘평면의 회화화’라고 하는 1970년대의 문제 설정에서 벗어나 과감히 ‘설치의 공간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난지도는 문명, 산업사회라는 특수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주변 잡동사니나 폐품, 그리고 볼품없는 재료들을 과감하게 기용하여 자신들이 지닌 사물에 대한 시각을 명료하게 표출하고자 했다. 반면 메타복스는 평면에서 일탈하여, 형식주의의 극복을 위한 의지를 뚜렷이 하였다.(예, 303p)


특히 표현에의 열망은 닫힌 전시실에서 벗어나 활동공간을 자연으로 확산시켜 1981년에는 《겨울 대성리전》,《야투 현장미술연구회전》등을 시작으로 넓게 확산되었다. 행위예술 또한 활성화되었는데 1960년대 해프닝이 전위적이고 1970년대 이벤트가 개념적이어서 일반 대중과이 소통이 어려웠던 반면에, 1980년대 들어 퍼포먼스는 표현성과 대중성을 중시하고, 무용, 연극, 비디오 등 대중매체와 결합하여 소통성과 참여도를 높임으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예, 304p) 특히 이 시기의 퍼포먼스는 전과 같이 표현 행위의 순수성으로서 행위 그 자체를 중시하기보다는 연극적 행위 공간 자체를 표현의 장으로서 현현 시키는 성격이 강하다.



Ⅳ. 결론


1960~1970년대가 사물과 주체를 동시에 부정함으로서 눈과 정신을 외부로 전환시켰다면, 1980년대는 외부적으로는 정치, 사회적인 혼란이 계속되었고 사상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이 유입되면서 예술계에 있어서 기존과는 근본적인 변화를 보였다.

후기양상은 1970년대의 고립된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계와 자아 간의 관계에 관심을 돌렸으며, 자아의식을 물성으로 환원시켜 평면과 단색으로서의 형식으로 표현하였던 경향을 벗어나 정감적인 기분을 비롯한 경험적 내용을 앞세워 서술과 표현을 지향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 정신은 70년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으며 여전히 자연과 자아의 내재성의 연속선상에서 사회와의 연계성을 지향하였다.


민중미술은 역사 • 사회적 내용을 담은 주제들을 다룸으로서 인간 해방과 민족 통일의 이데올로기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들에게서 역사 • 사회적 주제란 주로 한국의 불행한 근대사와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체제를 부정하며 궁극적으로는 현실과 체제를 전복하려는데 미술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도구로서의 유용성을 강조하였다.(서술, 70p) 이들은 예술이 사회와 연결되어 움직이는 하나의 현실임을 강조하며 작품의 내재성에 대한 관심을 의식적으로 혐오하였다.


신표현회화로 대표되는 극사실회화와 표현 자체의 정신적 • 물질적 현실의 주제들에 더 많이 관심을 두면서 행위와 세계의 만남을 시도하는 인스톨레이션 성격의 신매체미술은 각자 1980년대 들어 급변한 생활환경과 그에 따른 새로운 감수성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었는데, 외국의 극사실회화가 형상과 재현이라는 관계를 ‘그려진 오브제’ 개념으로서 의도적으로 일치시키려고 했다면, 한국의 극사실주의는 그리는 것과 그려지는 것 사이의 중첩을 애초부터 바탕으로 깔고 들어가며, 주체와 실제가 따로 있지 않다.


그들의 자연주의는 인간 근원에 존재하는 형상성에 대한 충동이며 -구상충동- 관념성에만 천작하였던 기존의 관념적 예술과 불안한 사회흐름의 대두에 따른 대한 시대적인 참여 운동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은 작품의 상황과 현실의 상황의 일치를 통해서 리얼리즘의 주관적의적 성향을 표현하였으며 서술과 표현의 의지를 가지고 형상을 통하여 현실의 모습을 작품 그 자체로 그려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의 작업은 기존의 극사실회화 라는 명칭 보다는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신매체미술은 형상보다는 행위와 물질의 만남과 드라마를 연출함으로서, 거친 몸짓의 흔적을 담은 오브제와 인스톨레이션을 통하여 일상적, 개인적 감성에 바탕을 둔 실험을 꾀하였다. 타라, 메타복스, 난지도 등은 자유로운 시각에서 개인의 삶을 전개함으로서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전개 하였다.


이 시기의 또 다른 모습으로는, 미술 운동의 그룹화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삶은 개별적인 것이 아닌 전체와 긴밀히 연결된 하나의 망 이라는 일념 하에 미술 역시 하나의 현실로서 작동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서 본격화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역설적으로 예술의 다원성 이라는 이념 하에 펼쳐 질 수 있는 자유로운 몸짓으로 오히려 제약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결과적으로는 예술의 담론을 획일화 하고 정치화하는 하나의 공간으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삶과 개인 주체를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 짓고 그것을 하나의 움직임으로서 구체화하여 하나의 현실적 운동으로서 현현시키려 한 의도는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80년대는 미술과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의 치열한 움직임으로서 용솟음쳤던 역동적인 시대였던 것이다.


조선의 불교회화와 폴 고갱: 먼 북소리 +리뷰들+

조선시대의 불화에는 머리로는 이해 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이것은 조선의 불교회화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특징이다. 이것은 고려의 화려하고 섬세한 기교에서의 아름다움이나 통일 신라 시대의 조형적 자연스러움의 표현에서 오는 아름다움과는 그 성격의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이것은 차라리 폴 고갱의 후기인상주의 회화들과 그 접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 할 것이다.


여태까지 한국의 불교회화들이 불교 고유의 정신성에 기초했다지만, 그것은 불교의 특유의 교리에 입각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불교의 회화는 불교 자체의 교리와 정신성과는 조금 동떨어진 성격을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이 작품들이 불교 자체를 부정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들은 분명 불교에 관련된 이야기와 교훈을 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집중해야 할 것은 이러한 소재가 아닌 표현에 관련된 것 이다.


조선 후기 불교 회화에서 보이는 강렬한 원색의 사용과 대비, 기존 시대들의 형태 표현에 비교하여 볼 때 부자연스럽고 조잡해 보이기까지 하는 조형성은 감상자로 하여금 자칫 조선 후기의 불교 회화를 싸구려로 취급해 버리기 쉬운 위험성마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 시대, 특히 고려의 불교회화 비교하여 조선의 불교회화는 도저히 머리로는 이해하기 불가능 한 불쾌한 미학, 즉 숭고를 아주 직설적인 원시성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기존 시대의 표현 미학과 차이를 보인다.


조선 후기 불교 회화의 직설성은 그야말로 종교 탄생 근원인 ‘세계에 대한 공포와 경외’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려의 불교회화가 불교의 정신을 우아함과 기품을 통하여 표현하려 하였다는 점 과 비교된다. 특히 이러한 회화들과 조각상은 지금과 같은 박물관이 아닌 사찰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의 불교가 어떠한 성격을 지녔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조선 시대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가 철저하게 형이하학적인 인간의 세계에 국한되어 사후세계와 자연에 대한 이해에서 멀어졌다면, 오히려 불교는 조선시대에 들어 이러한 종교의 토테미즘적 성향을 점차 강화시키며 토속신앙과 점차 가까워졌다. 절에 공양을 드리러 가는 시간이 보통 새벽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회화와 조각상 들이 신자들에게 어떠한 기분들 들게 하였을지는 자명하다. 그것은 마치 ‘마크 로스코’가 강연에서 이야기 했던 것 과 같은, 그러니까 ‘방문자로 하여금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은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설법하는 아미타불> 1828년 제작, 조선 후기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년




조선 후기 불교화만의 독특한 색채, 조형적 표현은 불교가 원시 종교가 지니는 기복신앙의 성향을 강하게 나타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부처는 이제 우리가 다다를 수 있는 이상향으로서의 이상이 아닌 세계의 절대자로서 중생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군림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조선 후기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보여준다. 그 어떤 시기에도 불교가 이렇게 원색적으로 기복 신앙적 성격을 가지지는 않았다. 모든 국가의 혼란기에 종교는 언제나 절대적인 신을 중심으로 하는 원시 종교적 성향을 강하게 나타낸다. 이것은 마치 한국 개신교가 기복 신앙적 성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포교의 핵심으로 삼음으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제1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와 흡사하다. 인간은 어찌 할 수 없는 현실을 맞닥트릴 때 언제나 신을 찾는다. 이 신은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우리의 삶을 관장하는 원초적인 모습의 신이다.

사실 이런 인간존재에 대한 무력감과 그에 따른 회의감은 19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도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후기 인상주의’의 대가 폴 고갱은 특히 원시문화의 종교성을 포착하고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탐구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조형적 성격에 있다. 그는 전통적인 자연주의적 회화에서 벗어나 강렬한 색채와 인물의 도상적 배치에 중점을 두었는데 특히 위의 작품에서는 기존의 회화적 표현과는 대비되는 평면적 성격이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고갱의 실험들은 이후 직접적으로 야수파와 표현주의를 거쳐 간접적으로는 앵포르멜과 미국 추상표현주의에 까지 사상적인 영향을 미친다. 재밌는 사실은 원색적인 색채 사용과 대비, 인물의 도상적 배치와 자연주의적 환영성의 공간 재현을 포기한 평면에 대한 과감한 표현이 조선 후기 불교 미술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비록 형태적으로 고갱의 그림에서는 종교회화에서 나타나는 인물에 대한 뚜렷한 상징화 표현과 장식성이 나타나지는 않으나, 조선 후기 불교회화가 종교 특유의 숭고함을 전달하기 위해 오히려 일반적인 미학에서 과감히 멀어졌던 것과 고갱이 모더니즘의 물결 속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원시 문명에서 찾고 이를 자연주의적인 환영성의 표현 방법이 아닌 색채와 상징적인 도상적 배치로서 표현하여 감상자에게 기존의 ‘보는’ 습관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서 직관적인 이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 중시했다는 사실은, 두 이질적인 장르의 회화가 근본적으로는 같은 의도에서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세계에 대한 이성으로서의 이해가 아닌 직관성으로서의 이해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세계를 이해하려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인 몸부림이다. 그것은 종교로서 표현되기도 하며 예술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두 상이한 방법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성과를 보여주었는지는 아직도 생각 해 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형연 할 수 없는 세계를 적어도 인간이 인식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표상하였다는 점 은 분명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단지 우리가 이제까지 알 수 있었던 사실은 세계에 대한 이해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먼 북소리와 같은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이상향에 대한 영원한 향수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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